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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무비스님 능엄경 강의(1)

원시인62 2010. 4. 13. 13:17

무비스님 능엄경 강의(1)


능엄주(楞嚴呪)를 함으로 해서 능엄경(楞嚴經) 전체의 그 공부를 대신하는 것으로써 생각을 하면 되겠습니다. 능엄경은 전반부는 보면은 마음의 문제를 아주 심도 있게 다루는 그런 경전입니다. 어떤 경전보다도 마음의 실제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치밀하게 어떤 대화를 통해서 아주 반복해가면서 여러 가지 각도에서 마음의 문제를 분석해 들어가는 그런 경전이 능엄경(楞嚴經)입니다.


불교는 뭐 아시는 바와 같이 마음공부를 하는 종교다. 또는 뭐 깨달음을 이야기 할 때도 결국은 뭐 마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렇게 쉽게 이야기를 합니다. 수행도 마음을 닦는 것으로 돼 있기 때문에 왜 그런고하니 마음은 모든 것의 주체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어떤 그 최상을 바로잡고 한 인간의 삶을 바람직한 괘도에 올리는 것은 「그 근본이 어디 있는가?」라는 것을 불교에서는 마음에 있다고 깨달았습니다. 정말 바로 깨달은 것이죠. 그래서 도처에 많은 이야기가 산적해 있고 불교에 우리가 들어오게 되면 언필칭 마음공부다 마음닦는다 또는 뭐 마음을 관한다 뭐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됩니다. 이건 당연한 것입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근본이 돼서 이뤄내고 또 마음에 의해서 일체법이 건립돼있고 또 마음이 없음으로 해서 일체법이 또 소멸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심생즉종종법생(心生則種種法生)하고 심즉멸종종법멸(心滅卽種種法滅)이라. 마음이 생기면 온갖 것이 이 세상 온갖 것이 다 따라서 생기고 마음이 없으면은 일체 것이 다 따라서 없어진다는 유명한 말이 있죠. 그래서 불교의 가르침은 대다수가 마음에 대한 말씀이고, 특히 능엄경은 마음에 대한 분석을 아주 그 심도 있게 아주 논리정연하게 분석해 들어가는 그런 그 경전이 능엄경(楞嚴經)입니다.


그래 마음이 어떻다고 하는 것을 알고 그담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인가? 이런 질문이 나오죠. 마음이 그런 것이라면 그 다음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제 그런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러면은 수행(修行)을 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 능엄경(楞嚴經)의 뒤로 넘어오면은 말하자면 수행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마음을 닦아갈 때 그 단계가 과연 있는가? 아니면 한번 닦는 것으로써 끝나는가? 뭐 이런 문제도 굉장히 깊이있게 이야기를 하지요.


그래서 거기에 보면은 52位 내지 무슨 뭐 56位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 이런 이야기도 능엄경에 역시 나와요. 그래서「마음을 파악하고 그 마음을 중생의 마음에서 부처의 마음으로까지 이끌어 올리는 데는 그런 단계가 있다」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그런 단계를 거치면서 수행을 쌓아가는 과정에 온갖 장애(障碍)의 요소가 이제 생긴다는 거에요. 우리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당연히 거기에는 방해가 되는 일이 있고 마음의 장애로써 이런 저런 어려운 문제들이 생기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렇듯이 수행을 하는 데에는 더 그렇습니다. 도고마성(道高魔盛)이라.「道가 높을수록 魔도 성하다.」라는 그런 말이 있고, 또 우리말에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하는 말이 있듯이 수행에는 그 장애 요소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일러서 소위 마(魔)라고 그래요. 그런데 그런 魔를 그냥 둘 것인가?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하는 그런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능엄경에는 50종 변마장(五十種辨魔障)이라는 것이 있어요. 50가지의 마음 종류를 열거하고 그것을 하나하나 분별해 낸다 하는 이야긴데 그 마(魔)를 이제 분별 말하자면 열거하는데 보면은 부처님 모습을 갖춘 그런 魔도 있고 관세음보살의 모습을 갖춘 魔도 있고 별별 마(魔)가 많이 생깁니다. 그래 50가지나 되니까 거기에 뭐 없는게 없지요. 그러니까 어떤 부처의 허울을 쓰고 나온다는 거에요. 그것이 꼭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한 마음의 어떤 그 정도가 아닌 생각이 일어나면은 내 생각이 그런 마(魔)를 만들어 내는 거지요. 그런데 거기에 이제 끄달려가다 보면은 결국은 내 마음을 잃어버리고 다른 길을 헤매게 된다 하는 그런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서 50가지의 마(魔)의 문제를 열거를 하고 또 그것을 분별하는 안목을 키워야 된다고 하고 또 이런 경우는 마(魔) 인줄을 알라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를 하던지 무슨 참선을 하던지 공부를 하는데도 사실은 이것은 마(魔)다 라고 하는 것을 분별을 할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할 것입니다. 또 설사 분별했다손 치더라도 그럼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고 하는 문제가 생기지요. 그래서 나온 것이 말하자면 능엄주가 되는 것입니다.


능엄주(楞嚴呪)는 우리가 공부하려고 하는 능엄주는 마(魔)를 극복하는 魔를 퇴치한다고 할까요? 이런 의미로 상당히 그렇게 부각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하게 魔를 퇴치하는 그런 주문(呪文)으로써 또는 다라니로써의 역할도 물론 있으면서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삼매에 들어가는 공부가 됩니다. 그래서 어쩌면은「마(魔)를 퇴치하는 일보다는 능엄주를 통해서 삼매(三昧)에 몰입하는 그런 것이 오히려 능엄주의 본래의 뜻이다」라고 보는게 오히려 나을 거에요. 왜냐하면「魔를 퇴치한다」라고 하는 말은 마(魔)가 생기기 전에 魔에 대한 의식을 함으로 해서 잘못될 가능성이 아주 높아집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의 삼매를 능엄삼매(楞嚴三昧)라고 하는 능엄삼매를 이루어 가는 삼매를 이루어가는 그런 그 공부 방법으로 그렇게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됩니다. 왜 그런고하니 능엄경은 지혜가 너무 많고 그 다음에 선정(禪定)은 부족한 그런 그 어떤 폐단을 막기 위해서 생긴 것이 말하자면 능엄경이 되는 거에요. 능엄경(楞嚴經)은 그런 그 어떤 삼매(三昧), 선정(禪定)이라고 하는 것은 삼매지요. 삼매를 이뤄가는 한 방법으로써 다시 말해서 우리가 흔히 참선(參禪)할 때 드는 화두(話頭)와 같은 것으로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능엄주(楞嚴呪)를 평생을 의지해서 외운다든지 아주 열심히 능엄주를 외는 그런 그 수행이 있습니다. 또 능엄경에도 보면은 능엄주를 외울 때에는 8888 준비를 하고 말하자면 단을 마련하도록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말하자면 불단(佛壇) 같은 단(壇)을 마련을 하는데 아주 그 이상한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설산(雪山)에 있는 무슨 그 흙을 구해오고 또 설산에서 비니초라고 하는 아주 좋은 약초가 있습니다. 그 약초만 보면 소가 있다는 거에요. 그 소의 그 소똥을 구해가지고 단(壇)을 칠하라는 이야기라든지 그것은 물론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긴 있습니다만은 그러나 액면대로만 보면 이상한 색채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능엄경을 밀교(密敎)의 경전이다 그렇게 합니다. 밀교의 경전으로 분류를 해요 본래.


그리고 이 저 능엄경(楞嚴經)을 뭐라고 할까요? 편찬한 이 번역한 이 이런 이들을 역사적으로 이렇게 추적해보면은 불공삼장(不空三藏)이라든지 이런 이들이 거기에 관계가 됩니다. 그런 이들은 소위 그 밀교(密敎) 계통의 대가로 그렇게 역사적으로 아주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래서 능엄경은 일찍이 밀교(密敎)의 그 부(部) 속에 그러니까 우리가 뭐 선종부(禪宗部)다 화엄부(華嚴部)다 법화부(法華部)다 무슨 소승부(小乘部)다 열반부(涅槃部)다 이렇게 이제 경전의 내용 따라서 그 구분을 정할 때 밀교부(密敎部) 속으로 이제 넣습니다. 이 능엄경(楞嚴經)은요.


그래서 밀교적인 색채가 굉장히 많은 경이고 또 선종(禪宗)에서요. 중국에서 총림(叢林)에 중국 그 총림에 참선(參禪)을 하는 일상 속에 반드시 아침에 능엄주(楞嚴呪)를 외우도록 그렇게 일과로 또 편성이 돼 있는 그런 입장을 생각을 한다면은 말하자면 마구니를 퇴치하는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어떤 그 마를 제거하는 그런 역할로써 또 능엄주를 외웠던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능엄주(楞嚴呪)의 그 본래의 목적은 삼매(三昧)를 이루는 것으로 능엄경에서는 그래 돼 있는데 후래(後來)오면서 선종사찰 다시 말해서 총림에서 능엄주를 외우게 된데는 공부하는데 뭐 기도를 하던지, 경을 보던지,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던지 간에「어떤 경우의 수행이라도 修行하는 과정에서 일어나기 쉬운 魔를 항복받고 퇴치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써 또 능엄주(楞嚴呪)를 외우기도 했다」라고 하는 것이 증명이 되고는 있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면이 있어요. 본래의 의미는 三昧를 이루는 것이고 또 우리가 활용하는 입장에 있어서 또 총림에서 쓰여지고 있던 입장에는 마를 조복받는 그런 입장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 입장을 같이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되는 거지요.


이 佛敎라고 하는 것이 뭐 華嚴의 思想으로 모든게 이루어져있다 또는 뭐 密敎사상으로 모든게 이루어져있다 또 禪宗으로 모든게 이루어져있다 그렇게 단적(端的)으로 우리가 선(線)을 그어서 이야기 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한국불교는요. 한국불교는 대개 이제 보면은 고려이후 禪佛敎라고 그렇게 합니다. 그럼 신라때도 불교가 있었어요 또 신라때는 보면은 화엄불교였습니다. 그러다 또 구산선문(九山禪門)이라고 하는게 있어서 또 화엄불교 이전에 또 이제 구산선문의 역사를 들어본다면 또 그 당시 또 禪이 없었던게 아니고 그런데 그 속에 우리의 의식 속에는 화엄사상 법화사상 또 禪思想 이런 것이 기각돼 있고 내가 살펴보면은 密敎的인 색채가 한 20%가 있어요. 千手經이 우리의 의식에 꼭 있는 것인데 그것도 밀교경전이거든요 능엄경도 밀교경전이거든요. 이런 것이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돼 있고 또 대승경전(大乘經典)이라 하더라도 대승경전의 부분부분에는 밀교적인 색채가 상당히 가미가 돼 있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종합적이죠. 그래서 어떤 그 선택되지는 않는데 또 우리가 한 마디로 뭐라고 또 선불교다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짧은 반야심경(般若心經)도 뒤에는 보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제사바하』라고 하는 주문(呪文)이 나오거든요.


주문(呪文)이니 진언(眞言)이니 하는 것이 전부 密敎에서 하는 거지, 현교(顯敎) 다시 말해서 교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그 밀교와 상대되는 현교(顯敎)에서는 그렇게 감춘 방법으로 또 어떻게 비밀스런 방법으로는 교리를 나타내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보면 대승경전(大乘經典)에도 그렇게 밀교적인 색채가 다 들어있습니다. 법화경에도 있고 화엄경에도 있고 다 있어요. 법화경(法華經)에는 심지어 다라니품(陀羅尼品)이라고 하는 다라니품이 또 따로 독립된 품이 있을 정도입니다. 능엄주(楞嚴呪)에 대한 주변 상식은 그쯤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능엄주(楞嚴呪)에 대한 공덕(功德)을 능엄주를 능엄경에서는 부처님이 설하시고 나서 뒤에 이제 소개를 합니다. 이건 이제 우리가 능엄주를 공부를 다 하고 나서 또 우리가 살펴볼 대목이긴 합니다만은 먼저 능엄주를 아주 信心있게 공부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써 내가 공덕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말하자면 이익이죠. 능엄주를 공부하면 이런 이익이 있다 하는 그런 이야기가 됩니다. 능엄경 제7권에 보면 부처님께서 대불정능엄신주(大佛頂楞嚴神呪)를 설하시고 아난에게 이렇게 말씀한 대목이 있습니다. 아난아 이 부처님의 정수리광명이 모여 된, 정수리 광명이라고 해서 정수리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제일 높은 곳, 부처님의 신체의 제일 높은 곳을 정수리라고 그럽니다. 거기에서 빛나는 광명이 모여서 된 시타타파트람 비밀한 가타 또 미묘한 그런 시방의 온갖 부처님을 내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능엄주(楞嚴呪)는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출생시키는 말하자면 불모(佛母)다 하는 그런 이야기가 됩니다. 시방여래(十方如來)가 이 주문(呪文)으로 인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뤘다 그랬어요. 또 시방의 모든 여래가 이 주문을 듣고 모든 마구니를 항복 받았다 또 외도를 이기는 것이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여기가 마구니를 항복받는다 외도를 이긴다 라고 하는 그런 그 표현이 능엄경 본경에도 부처님의 입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것은 마구니를 항복받는 그런 한 방법으로 볼 수도 있다는 거죠.


또 시방 여래가 이 주문(呪文)을 타시고 이 주문을 의지해서 보배 연꽃에 앉아 미진(微塵)같은 세계에 들어가시는 것이다. 또 시방여래가 이 주문을 머금고 미진 같은 세계에서 법문을 설하신다 또 시방여래가 이 주문을 가지고 시방세계에서 수기(授記)를 주신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불성이 있다 그런 까닭에 모두가 성불할 것이다 라고 하는 이런 수기도 결국은 이 능엄주를 통해서 이뤄진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시방여래가 이 주문을 의지하여 여러 고생하는 이를 제도하신다. 그러니까 고해중생(苦海衆生)을 제도(濟度)하는 것도 결국은 이 능엄주를 통해서 하는 것이다 또 시방여래가 이 주문을 따라서 시방국토에서 선지식을 섬겨 공양하고 항하사여래(恒河沙如來)의 법왕자가 된다 하는 이야깁니다. 뭐 이런 이야기가 수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뭐 이렇게 큰 공덕을 말씀을 죽 길게 하시고도 또 끝에는 이런 말씀을 하세요. 내가 만일 이 주문의 공덕을 다 말하자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치지 않고 항하사겁(恒河沙劫)이 지나도록 말하여도 다 할 수 없느니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러니까 열두 시간을 계속 칭찬을 하고 공덕(功德)을 설명을 하는데 그렇게 하기를 항하사겁이 지나도록 한다해도 다 할 수가 없다 라고 까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무엇이든 믿는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게 믿고 우리가 열심히 외우시고 또 거기다 뜻을 알고 외우시면 더 효과가 있지 않겠나 하는 것입니다. 또 이 주문의 이야기 할 때는 이건 원래 해석 할 수 없는 것이고 해석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들을 우리가 할 수도 있습니다.


종래에는 대개 보면은 이것을 아는 사람만 지극히 전문가인 아는 사람만 몇이 알았지 그 나머지는 전부 그냥 외우기만 했습니다. 주문 같은 것은 거기도 굉장히 의미가 있어요 사실은. 주문(呪文)이나 진언(眞言)이나 다라니(陀羅尼)나 같은 말입니다. 그래도 이제 일심으로 외운다고 하는 그 사실이 그것을 통해서 돌아오는 이익이나 공덕이 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든지 의미 없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뭐 아는 사람들끼리 이렇게 척 보고서 한 번 씽긋 웃는데도 거기는 그 나름의 의미가 다 있습니다. 사실 그거야 말로 주문인거죠. 그보다 더 아주 뛰어난 주문은 없을 것입니다. 또 서로가 아주 친숙한 사이에 또 공통된 어떤 그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일에 대해서 이미 잘 서로가 의논이 되어있는 그런 상황이라면은 이렇게 그냥 보고 오늘 와서 이런 말을 한 마디 할 수 있어요. 오늘 와서 이런 말 한 마디하면은 “어 알았어” 라고 대답할 수가 있어요. 그런 경우가 우리는 일상에서 아주 많습니다. 그럼 그 말이 뭐에요 도대체가. 그건 주문일 수밖에 없습니다. 남이 들으면 그건 주문(呪文)이에요. 그러나 그 사람들끼리는 그 속에 “알았느냐” “알았다”라고 하는 그 말 속에 모든 그 날의 그 사람들이 해야 될 일들이 전부 포함돼 있는 거죠. 과거에 해오던 일들 앞으로 할 일도 그 속에 다 포함돼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았느냐” “알았다”고 하는 그 말의 의미가 없는게 아니란 뜻입니다. 뜻이 많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차마 그것이 설명이 어렵다는 것뿐이지 뜻이 없다는 말은 아니고 또 뜻을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주문(呪文)이니 진언(眞言)이니 다라니(陀羅尼)니 하는 말을 그렇게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 보통 현교 교리를 설명한 경전 속에도 보면은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密多)』라던지 『바가바』라던지 여기 이제 『바가바』란 말이 많이 나오는데 그런 말 뭐 『열반』이라든지 『보리』라든지 이런 그 인도말을 그냥 둔 것들도 있고 상당히 많습니다. 그건 이제 《오종불번의 원칙(五種不飜의 原則)》이라 해가지고 〈다섯 가지 이유에서 그걸 번역하지 않고 그냥 둔다〉라고 하는 그런 말이 있어요. 그럼 그게 뭔고하니 뜻이 깊기 때문에 한 가지 말로만 번역을 해 버리면 뜻이 손상이 된다. 그래서 번역 안한다 그래요. 또 존중하는 뜻에서 거기 있는 말을 그대로 하면은 굉장히 존중스럽거든요. 우리도 연설 같은 것을 하다가 한자(漢字) 무슨 문자(文字)를 탁 쓴다든지 무슨 영어의 어떤 명구(名句)를 척 쓰고 다시 해석을 한다든지 이러면 훨씬 그 돋보이지 않습니까 그 말이. 그래서 또 번역안하는 경우도 있어요. 또 여러 가지 뜻을 포함하고 있다 뭐 존중(尊重)한다. 그리고 또 이쪽 지방에는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고유명사죠. 그런 것은 아무리 번역해봐야 안 통하니까 그냥 둔다 쓴다.


진언(眞言)도 주문(呪文)도 역시 이제 그런 의미까지를 포함하고서 이제 번역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근래에는 많이들 해석을 합니다. 역시 이건 글이고 글이다 보니까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제가 뭐 이 범어(梵語)를 본격적으로 공부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익히 외우는 그런 것들은 조금 이제 관심있게 좀 들여다보고 또 어디서 공부할 수 있는데 까지 공부해 보고 그랬어요. 그래서 뭐 이 능엄주 전체를 문법적으로 또는 범어학적인 그런 차원에서 제대로 파악이 된 상태는 아니나 그러나 대체적인 뜻이 이렇게 이렇게 돌아간다 라고 하는 것만 우리가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또 주문(呪文)이다 보니까 어떤 그 문법적인 것이 구체적으로 갖춰져 있지가 물론 않고 또 설사 갖춰져 있다 하더라도 내가 이제 그런 것을 제대로 이해를 소화를 하고 설명할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도 아직도 능엄주에 대한 글을 제대로 다 100% 파악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대충 이런 뜻이다 라고하는 그런 정도로만 지금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정도 선에서 우리가 이해를 하고 그쯤으로 이해를 해도 능엄주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그런 그 기회가 충분히 되지않겠나 뭐 이렇게 보아지기 때문에 그런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우리가 이번에 이렇게 한 번 공부해 보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교재를 펴시기 바랍니다.


대불정능엄신주(大佛頂楞嚴神呪)라 그랬는데 이것이 이제 능엄주(楞嚴呪)를 열심히 외우는 사찰들 또는 신도님들 또는 스님들이 계셔요. 그래서 이것을 이제 외우기 쉽도록 이 교재에서는 이렇게 유사한 구절들을 파악하기 쉽도록 이렇게 인쇄를 했습니다. 저도 그 난청 그 강원을 졸업하고 해인사 선방에 이제 올라갔을 때 요즘은 해인 총림에서 능엄주를 안 외웁니다만은 그전에 제가 해인사 선방에 처음 갔을 때는 능엄주를 아침에 외웠었어요. 그리고 오후에는 백팔참회를 하고 그게 인제 선문일송(禪門日誦) 속에 들어있었습니다. 선방생활이 본래 아침에 능엄주 외우고 저녁에는 백팔참회를 하고 그때 제가 능엄주를 외웠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능엄주를 외우지 못하면은 해인사선방에 방부를 받아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열심히 외운다고 외워가지고 한철동안 매일 독송을 하고 했던 인연이 있습니다.


우리의 이 교재에 능엄주(楞嚴呪)를 외우는 의식을 생각을 해서 능엄주만 올리질 않고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부터 이렇게 했으니까 뭐 한 번 처음부터 설명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능엄주를 이제 외울라면 구업(口業)을 깨끗하게 뭐 양치질이라도 해야 하니까 그래서 이제 정구업진언이 서두에 왔습니다. 모든 경전을 우리가 제대로 읽을 때는 정구업진언하고 여기 있는대로 개법장진언(開法藏眞言) 옴 아라남 아라다 까지 외우고 그 다음에 이제 금강경을 외우던지 무슨 화엄경을 읽던지 경을 읽는 것이 본래 수행으로써의 독경의식(讀經儀式)이 제대로 갖춰진 것이다 라고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꼭 요걸 참고로 하시기 바랍니다. 經을 읽을 때 이렇게 의식(儀式)을 갖춰서 하면은 그냥 여시아문(如是我聞)부터 읽어도 좋습니다만은 그러나 이제 의식을 이렇게 갖춰서 하면은 그만치 무게가 있고 존중하는 의미가 있고 그렇게 하면 내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좀 더 다르다 하는 그런 뜻이 되겠죠.


구업(口業)을 청정(淸淨)하게 하는 진언(眞言)이다 그랬어요.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라고 했는데 「수리」란 말은 「길상」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능엄주에도 아까 내가 보다보니까 나오더라고요. 길상 길상 「마하수리」 「큰 위대한 길상」, 「수수리」 앞에 수자는 「지극히 길상스러운」 그 다음에 「스바하」는 보통 우리가 「사바하」라고 하는데 「성취」 또는 「결정」의 의미가 있습니다. 딱 이렇게 확정하는 그런 의미가 사바하에는 있어요.


여기서 길상(吉祥)이라고 하는 말은 입을 길상입니다. 입이 아주 그 양반이다 아주 길상스럽다라고 하면은 좋은 말을 쓴다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주 칭찬하는 말, 축원하는 말, 찬탄하는 말 이것만 써야 그게 이제 입이 길상스러운 것입니다. 뭐 남을 헐뜻는 소리라든지, 아니면 욕하는 소리라든지, 악담을 한다든지 비난하는 소리라든지, 이건 영 이건 쌍스러운 소리가 되고 말하자면 험악한 소리가 되고 또 불길한 어떤 그 일을 불러오는 그런 입이 됩니다. 그 반대죠. 그래서 칭찬 찬탄 축원 이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모든게 남을 향해서 잘 되도록 축원해주고 격려해주고 칭찬해 주는 것이 이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뭐 행복하십시오 라고 하는 말이라든지 잘한다 라고 한다든지 잘 되기를 빈다든지 꼭 잘 될 것이다 라고 한다든지 사바하가 있기 때문에 잘 될 것이다 확신을 하고 하라.


예를 들어서 뭐 사업을 지금 시작했다 그러면은 아주 그 점(??) 많이 봤다라고 확실하게 이제 믿음이 가도록 해 주는 거에요. 아! 잘 될 거야 수리 한 번 한다 그 다음 두 번째 잘 될거야 아주 잘 될거야 그런 뜻이거든요. 마하수리가. 틀림없어. 틀림없이 잘 될 거라고.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확신을 가져라. 이 저 확신을 가지고 하는 것 하고요, 될까 안될까 어떤 그 반신반의하는 자세로 하는 것하고는 천지차이라, 일을 이뤄가는 것이요. 그래서 이 사바하는 확정을 짓는 마음의 요지부동이 돼 버리는 거지요. 그러면은 어떤 일도 사실은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건 이제 뭐 행복하십시오 라고 한다고 할 수도 있고, 또 성공한다 라고 할 수도 있고, 무엇이던지 다 이 상대를 향해서 도움이 되는 좋은 말은 여기에 다 해당됩니다. 수리란 말 속에 다 해당이 됩니다. 그래서 행복 성공 뭐 잘 한다 뭐 합격 뭐 하이튼 우리가 바라는 희망스러운 그런 말은 이 수리라는 뜻 속에 다 포함됐어요. 왜냐 길상스러우니까 그것은. 그런 말은 길상스럽기 때문에.
그 다음에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五方內外安慰諸神眞言)입니다. 요 저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 이야기 조금 더 하면은 이 구업을 깨끗하게 한다 이렇게 했어요 제목엔 보면. 그럼 우리가 악담을 실컷 해 놓고, 남의 험담을 실컷 해 놓고 그것을 뭐 깨끗이 청소하는 입장으로써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라고 했습니다. 청소하는 길이 있어요 분명히. 그것은 이 순간 이후로 칭찬하는 것입니다. 절대 악담하지않고 비방하지 않고 *****축원하고 진정으로


여기 보십시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다섯 번이거든요. 어떤 일도 또 세 번만 넘으면 장난이 아니라고 하잖습니까 이 무려 다섯 번입니다. 이렇게 다섯 번을 진정으로 축원하고 찬탄한다면은 그 사람 입은 아주 청정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 입으로 지은 업이 청정해지는 것이지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없어요. 뭐 아주 그 부적같은 그런 역할은 아니에요. 우리가 부적(符籍)에 대해서 상상하는 그런 그 진언은 아니에요 진언은 본래 그런게 아니에요 그런데 그런 것처럼 느끼고 있죠. 또 그렇게 믿고 있고 또 그렇게라도 믿고 열심히 하면 하는 것만 이익이니까 하는 것은 좋습니다만은 진정 업을 구업을 청정하게 할려면 칭찬해주고 찬탄해 주어야돼요.


그 다음에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五方內外安慰諸神眞言)은 오방내외(五方內外)에 있는 모든 신들을 안위(安慰)시킨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만 있다고 생각할 수가 없는 거지요. 보이지 않는 세계가 우리 주변에 훨씬 더 큽니다. 또 보이지 않는 어떤 그 불보살이나 아니면 뭐 신들이나 그런 이들의 힘이 또 내가 살아가는데 더 큰 역할을 합니다. 어떤 佛事를 하던지 또는 경전 한 권을 읽더라도 주변이 말하자면 환경이 경을 읽을 수 있고 불사를 할 수 있도록 돼 있어야 되는 거죠. 그게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五方內外安慰諸神眞言)입니다.


「나모」라고 하는 말은 「귀의한다」라고 하는 말입니다. 「나무」나 「나모」나 「나맣」이나 여러 가지로 표기가 되는데 그건 이제 문법상 또는 전사하는 옮겨서 쓰는 과정에서 이렇게 「나무」 「나맣」 「나만」 「나모」 여러 가지로 됩니다. 「귀의」란 뜻입니다. 이 소위 태장계(胎藏界) 정형구라 그러고 「옴」자가 들어가면 이제 금강계(金剛界)의 정형구라 그 밀교(密敎) 계통에서는 그런 어려운 말들을 씁니다.


「사만다」는 「보변」. 「널리 두루 계신다」 이 말이에요. 누가? 붓다가. 붓다가 널리 두루 계신다. 그래서 남자는 널리 두루 계시니까 한 분이 아니다 그래서 복수로써 「남」을 씁니다. 널리 두루 계시는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귀의하며 받드옵니다. 이 「나무」라는 말은 다른 사람이 귀의하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받드는 일 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귀의합니다 말로만 귀의하면 뭐합니까? 받들어야지 구체적으로 받들어야죠. 그러니까 『널리 두루 계시는 많은 부처님들께 귀의하며 받드옵니다.』


그리고 이제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 그러니까 부처님께 일단 귀의하니까 부처님의 빽이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경전을 읽는 일이 부처님을 믿는 그런 신심이 말하자면 배경으로 있다고 하는 것을 여기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부처님의 빽만 가지고 모든게 이루어지느냐? 그게 아니에요. 주변에 있는 나보다도 더 못한 또 눈에 보이지 않는 부처님하고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곳에 있는 그런 하천한 신들도 잘 다독거려야 된다. 하는 이야깁니다. 그랬을 때 주변이 조용해지는 거에요. 주변이 경전 한 편이라도 읽을 수가 있고, 불사를 할 수가 있고 뭐 어떤 일을 예를 들어서 여기다 건물하나 세워도 구청에 가서 허가만 받아온다고 되는게 아니에요. 이 주민들을 잘 다독거려야 돼. 요즘은 주민들의 힘이 더 세다고요. 허가가 중요한게 아니야.


예를 들어서 허가는 「나무 사만다 못다남」 이라면은 주민들에게 이해와 양해를 구해가지고 아 주민들이 아! 좋은 일 한다고 뭐 불편한게 없냐고 이렇게 해서 호의적인 태도로써 그 일을 도와줄 수 있는 그런 여건 조성이 「옴 도로도로 지미사바하」야. 참 이치를 뜻을 알고 보면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치하고 너무나도 밀접한 그런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옴」은 지극히 찬탄하는 요즘 「옴」이 굉장히 야단이 났습니다만은 지극히 찬탄하는 그런 구절도 되고 또 혹은 찬탄도 하면서 혹은 말하자면 위협을 주는 섭복이라고 그래요. 포섭해서 항복을 받는 뭐 섭복의 의미가 있어가지고 요즘 「옴」자가 그렇게 야단을 하는지 몰라도 하이튼 항복을 받는 상대를 두렵게 하는 그런 의미도 「옴」자 속에 들어있어요. 그리고 이것은 『모든 부처님 법문의 어머니다』그래요. 그러니까 「옴」에서부터 부처님 법문이 나왔다 그래요. 또 더 이제 깊은 뜻은 『온 우주의 핵이다』그래요. 이 온 우주의 핵이 「옴」이고. 온 우주는 「옴」의 한 표현이다 이렇게 이제 봅니다. 그렇게 까지 이 「옴」자에 대한 의미를 깊이 부여합니다. 그래서 이 「옴」자 하나만 해도 진언의 왕이기 때문에 진언이 다 돼요. 진언이 다 되고 다라니가 다 되고 주문이 다 됩니다 사실은. 능엄주에도 「옴」자가 나옵니다. 안 나오면 안 되지요. 우리 천수경 안에도 뭐 「옴」자가 여러 번 나옵니다. 그래서 「옴」자는 모든 진언 주문 다라니에 아주 그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그런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옴」자가 들어가면 금강계 정형구다 이렇게 하는 거죠. 온 우주의 핵이고 또 모든 법문의 모체가 되는 것이고 또 상대를 지극히 찬탄하는 의미이고 또는 뭐 나를 두렵게하고 나를 해칠려고 하는 상대를 말하자면 항복받는 그런 입장도 되고 그렇습니다. 그전에 뭐 서울에 유명한 사람이 그 옴 옴 옴 해 가지고 그 녹음해 가지고 물에다 소리를 파장을 줘가지고 그 물을 마시면 만병통치한다 하는 그런 이야기도 떠돌아다니고 그랬었어요. 그 지금도 아마 구할 수 있을 거에요. 별거 아닙니다. 그 「옴」자 뜻을 알면 다 되는 거에요.


「도로도로」라고 하는 것은 요건 이제 진정시키는 형용사입니다. 말하자면 다둑거리는 그런 형용사인데 요건 이제 설명을 할 수가 없어요. 좀 잘 봐달라고 한다든지. 뭐 예를 들어서 주변에 파출소라도 가가지고 무슨 사이다라도 한 병 사 가지고 가가지고 하이고~ 웃는 모습으로 말이지 수고하신다고 아 이렇게 잘 해놓으면 여기서 일을 해도 잘 돌아간다고. 뭐 초파일 연등 행렬 같은 것도 뭐 이렇게 잘 주변 사람들에게 잘 보여 놔야 그게 되지 뭐 부처님 빽만 가지고 잘 돌아가는게 아니라구요. 그래서 위로는 「나무 사만다 못다남」 하고 밑으로는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야


「지미」는 여러 신들을 안위시키는 종자를 「디비」라고 「디비」라고 또 했는데 원음에 가깝게 쓴다고 했는데 우리보통 「지미 사바하」 그러죠. 「사바하」도 「스바하」라고 그래 놨네요. 이래도 틀리고 저래도 틀리고 어차피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소리니까요.


안위제신(安慰諸神) 뭐 여러 신들을 안위시키는 종자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뭐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 이렇게 하면 됩니다. 이렇게 이제 여건이 조성이 됐어요. 무얼 할려고 한다? 경을 펼칠려고 그래서 개경 그래서 경을 펼치는 게송이다. 이렇게 이제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 가장 높은 그리고 매우 깊은 미묘한 법이여!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라. 백천만겁이 지나더라도 참으로 만나기 어려운 것을 우리는 만났다. 아금문견득수지(我今聞見得受持)요. 그래서 내가 지금에 聞見, 듣고 보고 수지(受持)하게 됐다. 이게 우리 교육의 3단계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더러 합니다. 듣고 봐야 되요. 듣는 거만 가지고 안 되지요. 뭐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그러면 文字가 먼저 있고 經이 있는 거야. 보면 뭐합니까? 지껄 만들어야지 그래 수지야. 참 이 단계가 기가 막히지요. 어떤 그 염불 하나도요 또 경전구절 하나도 “야! 그 근사하다” 근사하다하고 끝나면 안 돼. 들었으면 보고 그것을 내 것이 되도록 외워버려야 돼. 수지(受持)해야 돼. 일단은 물론 그게 몸에 또는 정신 속에 무르녹아가지고 행동으로 나와야 진정한 수지겠지만은 그러나 일차적인 수지는 외우는 것입니다. 외워야 자기 것이 되요. 문견득수지(聞見得受持)라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意) 그렇게 만나기 어려운 것을 이제서 우리가 듣고 보고 수지하게 됐다. 그런데 이제 오직 바라는 바는 여래의 진실한 이치, 여래의 진실한 이치를 원컨대 알아지이다. 알기를 원하나이다. 원하옵건데 부처님의 진실한 뜻 알아지이다. 그렇게 했네요. 그게 중요한 거지. 이제 여래의 진실한 뜻이 과연 무엇인가 말로만 쫓아가면 진실한 뜻을 파악하기 어려운데. 무엇이 과연 진실한 뜻인가를 알려고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는 것입니다.


보면 개법장진언(開法藏眞言) 법장을 펼치는 진언이다 그렇게 됐어요. 그러니까 법의 창고를 열고 그 속에 들어가는 자세가 『옴 아라남 아라다』 입니다. 뭐 우리가 경전이라고 우리가 이렇게 하면은 제일 구체적이죠. 당장 우리가 경전을 펼치고 있으니까. 능엄주를 지금 외울려고 하는 순간이니까요. 그런데 참선도 마찬가지고 기도도 마찬가집니다. 그것도 역시 법장을 법의 창고를 펼치고 열고서 그 속으로 들어가서 그 화두 속에 또는 기도 속에 또는 경전 속에 몰입하는 거에요. 또 무슨 일을 하던지 그 일에 몰입하는 그런 그 가장 바람직한 자세. 그건 뭔고하니 『옴 아라남 아라다 』


「아라남」 이라고 하는 것은「옴」자는 설명 했으니까 「아라남」이라고 하는 것은「무쟁삼매(無諍三昧)」라는 뜻입니다. 갈등이 없어야 되요. 다툼이 없는 삼매라는 뜻인데 이 생각 저 생각 妄想이 없다 하는 뜻입니다. 괜히 뭐 능엄주 공부하러 와 가지고 한 번 왔으면 갈 때까지 그냥 잊어버리고 앉아있지 아이고 나는 기대하고 왔는데 별 볼 일 없구만 뭐 그럴 바에는 괜히 왔다하고 이 생각하고 있어봐야 지만 손해지 덕 될게 아무것도 없어요. 다음부터 안오면 그뿐인것인데 하고 있는 동안은 갈등이 없어야 돼. 그게 「아라남」이야. 그 무쟁삼매(無諍三昧)라고. 참 기가 막히지. 우리가 경전을 펼쳐놓고 또 어떤 일을 한다 놀이를 가도 마찬가지야 놀러갔으면 화끈하게 노는 것이지 ‘아이구 이 놀러오느니 차라리 집에서 그냥 염불이나 하고 앉았을 걸’ 이러면 놀이도 안 되고 염불도 안 돼. 염불하고 있는 사람은 또 ‘아이구 이 더운 날 놀러갈걸’ 이러면 또 놀이도 안되고 염불도 안된다고 참 이치가 기가 막혀 내가 이 저 진언공부를 하고는요 정말 참 기가 막힌 대목이구나 하는 것을 어떤 우리의 그 보통사람들의 일상에서 만나는 이치입니다. 다른게 아니에요. 우리 현실을 떠나서 불교가 없거든요. 어떤 경전 안에서 휘황찬란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우리가 하루하루 생활 전선에서 부딪치면서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그런 모든 일들 그 삶의 현장 그 자리를 떠나서 있는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 마디도 없어요. 일단 그렇게 우리가 원칙을 세우고 불교를 공부해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부처님이 해 놓은 그런 가르침인 것이죠. 「무쟁삼매」 「아라남」 이라고 하는 게 그겁니다. 어떤 일을 하던지 삼매 속에 들어가야 유익한 것입니다. 괜히 뭐 이 생각 저 생각 자꾸 해봤자 아무 것도 제대로 머릿속에 남는게 없는 거죠.


「아라다」 그러면 어떻게? 만족하는 거에요. 만족하면 되는 겁니다. 「아라다」는 만족이라는 뜻입니다. 그래 『무쟁삼매 속에서 만족하여지이다 』 그 말이에요.

출처 : ★건강과 재복 그리고 명예 축복★
글쓴이 : 이욱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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