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및 역사자료

[스크랩] 단군조선(壇君朝鮮)의 역사

원시인62 2008. 7. 2. 10:40

[펌]http://khanhistory.sidaesori.co.kr/sub_read.html?uid=43&section=sc46

 

이중재의 '환부역조' 만행을 규탄한다. 나참 07/04/24 [19:44]

 

시간이 갈수록 확신이 드는 것은 이중재가 민족사학자이기는커녕 가장 악랄한 매국세력이라는 것이다. 이미 누차에 걸쳐 지적했듯이, 그는 전형적인 지역주의와 신라주의적 마인드에 흠뻑 빠져있다는 것이다.

이미 올린 글들에서 지적했던 바, 우리 역사는 中毒, 倭毒에 찌들어 있으며, 이는 모두 실은 新羅毒의 결과이며, 다시 이 新羅毒의 본질은 ‘사대주의’를 넘어선 ‘同大主義’로 압축할 수 있다.

이 同大主義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이 없으며, 늘 방계이자 변두리 세력으로서의 신라가 선택했던 생존전략으로서, 매 역사적 상황마다 계통 불문 ‘최고 강자’에 들러붙고, 그것과 자신들을 하나로 동화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상고사 시절에는 자신들이 고대 한국의 적통이라 주장했고, 후대에 오면서 고구려의 일부로, 당나라의 일부로, 명나라의 일부로, 그리고 지금은 미국의 일부로 생존해오고 있는 실로 오랜 시간동안 지속된 신라주의의 악령이다. 바로 우리 민족사의 시원에서부터 존재했던 이런 암적 세력들로 말미암아 우리 역사는 지속적으로 위협 당해왔던 것이다.


이중재의 작업의 본질은 결국, 우리 민족사와 화하족의 역사를 동화시키는 ‘동대주의’의 발로에 불과하며, 이는 우리 근세조선이 ‘기자’라는 코드로써 우리와 한족을 동화시키려 했던 것보다 더욱 악랄하며, 치명적이다.

이중재의 작업의 기초는 중국 화하족의 진정한 시조인 ‘헌원’을 동시에 우리 민족사의 큰 축으로 설정하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헌원’ 역시 우리 동이족 출신이기에, 헌원을 시조로 하는 한족의 역사 역시나 우리 민족사의 일부로 봐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매우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미 지적했던 바, 우리 근세조선은 자신의 정체성을 ‘기자’로 두었다. 즉 ‘기자조선’에서 ‘조선’의 정체성을 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기자’라는 코드가 그 본래적 맥락에서 이해되지 않을 때, 우리에게는 독이 된다는 사실이다.

즉, ‘기자’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사의 위대성이 증명되기보다는, 그 시원에서부터 우리가 한족의 일부라는 이데올로기가 형성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헌원’이 비록 동이족 출신이지만, 그 ‘헌원코드’로써 한족의 역사를 우리에 귀속한다는 그의 명분과 그 시도는 그 자체로 매우 위험할 수 있다.

그의 명분과는 달리, 현실적으로, 그리고 실재로, 이중재의 ‘헌원코드’ 맥락을 보면, 우리의 우려가 단순한 기우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이중재는 ‘헌원’을 이유로, 우리 민족사의 최대 영웅중의 하나인 ‘자오지 천왕(치우천자)’을 욕되게 하는 짓을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그 후의 ‘고구려’의 정체성도 훼손하며, 결국은 우리의 고대사의 중추를 모두 헌원에 귀속시키며, 동시에 이런 ‘헌원계보’의 최후의 결정판을 신라에 두는 최고 악질적인 신라주의의 전형을 보이고 있다.


그는 근본적으로 치우의 본래적 위상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한족과 동일한 태도이다. 그리고 치우의 위상을 높이려는 시도를 ‘위서’인 ‘한단고기’에 기초한 비학문적 태도라고 비난한다. 이는 바로 전형적인 일제 식민사관의 악령이다. 이중재는 中毒/倭毒에 빠진 매국세력들의 논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매국논리’를 펼치고 있다.

치우천자의 위상은 ‘한단고기’를 몰랐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저작들에서 이미 명백하게 증명되고 있다. 단재 선생에 의하면, 치우는 천자로서 헌원이 이민족을 규합해서 도발한 것을, 각종 신기한 전술과 철제무기 등을 이용해서, 격퇴했고, 헌원으로 하여금 다시는 조선에 도전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게하고, 저기 하남성 이남지역으로 내쫓았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헌원에 대한 치우의 우위와 정통성’은 비단 ‘한단고기’만의 독특한 입장이 아닌, 민족사학의 일반적 결론이며, 이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중재는, 그의 반민족적 ‘헌원선망증’으로 말미암아, 역시나 ‘헌원’을 시조로 하는 한족 문명에 대한 사대주의에 찌들었던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기초, 우리 삼국사의 본질마저 파괴하고 있다. 이중재는 고구려의 근원을 헌원의 아들 고양씨에 두고 있으며, 신라는 금천씨에 두고 있다. 이는 바로 김부식의 주장이다. 그럼 백제는 어디에 근원을 두고 있는가? 이중재는 답할 수 없다. 또한 그의 사관에 따르면, 우리 민족사의 큰 고리인 북부여에 대해서 논할 수가 없다.

이와는 반대로 ‘삼국유사’를 비롯한 기타 여러 역사서들에 공통적으로 서술된 ‘고조선-부여-고구려/백제’의 계보는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 의하면, 고조선은 후대에 이르러 소위 3조선 체제로 전환된다고 한다. 그것들은 각각 ‘신조선(이두문으로 진조선)’, ‘불조선(이두문으로 번조선)’, ‘말조선(이두문으로 막조선)’인데,

이 중, 신조선은 고조선의 모태이자 ‘대단군’이 통치하는 중심조선이다. 수도는 아사달(지금의 하얼빈)이다. 그리고 이 대단군의 성씨는 ‘해’씨다. 그리고 바로 이점이 부여를 창건한 ‘해모수’가 고조선의 황손임이 드러나는 대목이며, 부여의 민족사적 정통성이 세워지는 대목이며, 후에 이 해모수의 증손자와 당시 황하의 유력자였던 하백의 딸 유화 사이에서 태어난 ‘주몽’의 위상과 그가 창건한 고구려의 정통성이 보증되는 대목이다.

즉, ‘고조선-부여-고구려’는 ‘혈통’ 상으로는 물론이거니와 ‘역사계승성’의 차원에서도 완벽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에 고구려의 국시가 ‘다물(고조선의 영광의 회복)’이 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한편, 또 하나의 민족사의 주축인 백제는 산동지역의 제수(濟水)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제수’로부터 유래한 그 뿌리를 망각하지 않기 위해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했던 것이다. 이는 바로 소위 대륙백제 혹은 백제의 요서지방 지배이론이 정당화되는 대목이다.


백제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역시 ‘부여’에 두어, 후대에 이르러서는 국명을 백제에서 ‘남부여’로 함으로써 자신들의 ‘부여계승성’을 확고히 한다. 그리고 이런 이유에서 백제는 분명히 우리 역사의 적통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同大賣國 세력의 괴수 김부식의 주장인 ‘처음에 온조의 뜻에 10개 무리들이 따라서 ’10제‘라고 했다가 나중에 세력이 커지자 ’100제‘라고 했다’와는 격이 다른 해석이다.

이와 달리, 신라는 그 어떤 확실한 고조선-부여와의 끈을 찾을 수가 없다. 비록 그들 역시나 우리 민족사에 포함될 수는 있어도 단 한 번도 민족사의 중추세력으로서 부각된 적도 없으며, 더욱이 그들 스스로가 그런 시도를 한 적도 없다. 오히려 그들과 그 후손들은 지속적으로 우리 민족사를 파괴하는데 앞장을 선 민족반역세력의 역사를 형성해왔을 뿐이다.

이런 명백한 민족사적 진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장을 고작 ‘한단고기’에만 기초한 비학문적 광기라고 매도하는 이중재의 역사만행은 이제 더 이상은 용인될 수 없는 환부역조의 대역죄로 처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중재의 불순한 무리들이 ‘시대소리’를 거점으로 해서 인터넷 상으로 자신들의 환부역조 이데올로기를 유포시키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자 한다. 이들은 시대소리를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만 악용하고 있을 뿐이다. 이 점을 시대소리 운영진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나는 시대소리가 검증되지 않는 헛소문에 기초한 삼류 음모론이 가공되는 쓰레기장이나 이중재 무리들의 이데올로기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

 

[펌]http://khanhistory.sidaesori.co.kr/sub_read.html?uid=43&section=sc46

 

단군조선(壇君朝鮮)의 역사(歷史) -이중재/박민우

 

 

壇君朝鮮 제1기는 盤固桓因氏 부터 시작되어 천황씨, 지황씨, 인황씨, 거방씨, 구황씨, 섭제씨, 연통씨, 서명씨, 거령씨, 구강씨, 초명씨, 탁광씨, 구진씨, 황신씨, 이령씨, 대괴씨, 귀외씨, 기호씨, 감자씨, 태봉씨, 염상씨, 개맹씨, 대돈씨, 영양씨, 무당씨, 태일씨, 공상씨, 신민씨, 기제씨, 차민씨, 진방씨, 하성씨, 회괴씨, 동호씨, 황담씨, 이광씨, 계통씨, 길이씨, 궤거씨, 희위씨, 호락씨, 사황씨, 소홀씨까지 44세를 이어오면서 60氏의 단군(桓因, 桓仁)이 존속했다. 역년 5038년간 이다.
 
이부분은 책을 참고 하는것이 좋겠습니다. "처음으로 밝혀진 한민족사 494p 부록" 을 참고함.

壇君朝鮮 제2기는 유소한웅 시대이다. 이때 부터 문화가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전쟁무기나 병기의 발달도 급속화 되었다. 유소한웅 시대는 모권주의(母權主義) 사회로 발전했기 때문에 적자와 서자 간의 권력 암투가 극심했던 것이 그 원인이었다.
 
壇君朝鮮 제3기는 BC.2357년 요임검(堯壬儉) 부터 시작된다. 그 24년 뒤 戊辰年에 堯임검은 도읍을 都平壤城 으로 옮기게 된다. 이때가 BC.2333년이다. 堯壇君朝鮮은 도당씨(陶唐氏)·제요씨(帝堯氏)·당요씨(唐堯氏)라고 하며, 일명 화덕왕(火德王)의 별칭을 갖고 있었다.
 
옮긴이 주 : 중국사서에 堯라고 한 인칭은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요임금, 요임검(堯壬儉), 요왕검(堯王儉)과 같다. 단군요왕검(壇君堯王儉)의 뒤를 이은 순임검(舜壬儉)의 순(舜)은 무궁화를 뜻하는 글자이다.
 
上上古時代(壇君朝鮮 제1기) 에는 특수 계층, 즉 대부(大夫:요즘 같으면 理事官 이상) 벼슬 이상만 文民을 하게 했다. 다시말해 상층 계급만이 자연사상의 道를 열 수 있도록 했다. 개중에는 몇 사람만 지목하여 자연사상의 본체인 五行의 道를 열도록 했다.
 
그러나 요순(堯舜) 시대에는 그 누구든 자연사상의 五行인 道를 열기만 하면 등용의 기회를 주었다. 어린아이든 목동이든 농부든 부인이든, 그 누구를 막론하고 공부를 제대로 하여 禪을 통해 五行 즉 자연사상의 道를 열기만 하면 능력에 따라 벼슬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너도나도 공부에 몰두하게 되고 불평불만하는 자가 없고 능력과 자질에 따라 등용되었다. 그런던 것이 夏나라 때 와서 禪을 통하지 못하면 스스로 외곽지대로 물러나는 일이 빈번해 졌다. 따라서 글공부는 하지 않고 무도(武道)에 힘쓰며 사냥과 활쏘기 말타기로서 힘을 길러갔다. 이때부터 흉노(匈奴)가 생기게 되고 문무(文武)의 대립이 시작될 조짐이 보였다. 그러나 워낙 문(文)에 의한 天道에 가까운 치세로 말미암아 큰 전쟁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殷나라 때 들어와 文武의 대립 양상이 뚜렷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桓仁시대에 온세계가 한 나라였던 것이 36개 나라로 分國化 현상이 시작되었다.

은상(殷商) 때는 문무의 대립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한民族은 차츰 분열로 치닫게 되었다. 文武의 중용이 조화를 이루었다면 周나라 때 와서 약 200개의 小國이 난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말해 春秋時代가 다가온 것이다. 이것은 周나라가 망한 뒤(BC.284년. 일부 史書에는 BC.314∼256년 난왕 때까지로 되어있으나 BC.284년이 끝나고 秦 魏 韓 趙 燕 楚 齊 등 난립의 싹이 돋아나 있었다) 秦나라의 득세가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가 열리게 된 것은 모권사회의 뿌리가 부권사회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된 동기라고 봄이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단군조선 第三期는 요(堯 BC.2357년), 순(舜 BC.2284년), 하(夏 BC.2224년), 은(殷BC.1766년), 주(周 BC.1122년)까지 그런대로 평화가 지속되어 왔다. 부분적으로는 부족간의 알력이나 사소한 세력다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BC.2357년에서 BC.284년 周나라가 망할 때까지는 2,073년간 표면적으로 태평세월을 유지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가장 전란이 극심했던 시대는 단군조선 第二期때 와 단군조선 第四期때 일어났다. 치우(蚩尤 BC.2707년)와 황제(黃帝 BC.2679년)간의 싸움. 친형제와 다름없는 사촌간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단군조선 第四期인 진(秦 BC.255년), 한(韓 BC.255년), 조(趙 BC.255년), 위(魏 BC.255년), 초(楚 BC.255년), 연(燕 BC.255년), 제(齊 BC.255년) 때 고구려(高句麗 BC.231년), 백제(百濟 BC.213년), 신라(新羅 BC.57년)와 같이 춘추전국 시대를 맞아 전란이 끊이질 아니했다.
 
이상하게도 壇君朝鮮 第二, 四期는 전쟁의 소용돌이가 극심했다. 그러나 壇君朝鮮 第一, 三期는 평화를 구가하던 시대였다. 1, 3기는 대성인들이 출현하여 선정을 했으며, 禪과 道의 정치를 자연법칙에 따라 시정(施定)했기 때문이다.
 
특히 춘추전국시대(壇君朝鮮 第四期) 에는 큰 나라였던 고구려, 백제, 신라 속에서 三國이었던 위(魏 AD.220∼265년), 촉(蜀 AD. 221∼263년), 오(吳 AD.222∼280년) 나라는 지역간의 전란이 약 40년 동안 끊일사이 없었다.
 
그후 南朝, 北朝의 세력판도가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南朝는 송(宋AD.420∼479년), 제(齊 AD.479∼502년), 양(梁 AD.502∼557년)으로 되었다. 그리고 北朝는 북위(北魏 AD.386∼534년), 동위(東魏 AD.534∼550년), 서위(西魏 AD.535∼556년), 북제(北齊 AD.550∼577년), 북주(北周 AD.557∼581년)으로 이어졌다.
 
그러니까 南朝는 AD.420년에서 589년까지 약 170년간 지속되었다. 北朝는 약 196년간 전란의 도가니가 계속되었다. 이때는 고구려 20대 장수왕(長壽王 AD.341∼421년) 이후이며, 고구려 25대 평원왕(平原王 AD.522∼563년) 때까지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백제는 21대 개로왕(蓋鹵王 AD.400∼425년)에서 27대 위덕왕(威德王 AD.529∼577년)까지이다. 그리고 신라는 19대 눌지마립간(訥祗痲立干 AD.414∼454년)에서 24대 진흥왕(眞興王 AD.537∼572년) 이후까지 전란이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수(隋 AD.589∼618년)나라는 30년간 지속되었고, 당(唐 AD.618∼907년)나라는 290년간 고구려, 백제, 신라 속에서 함께 전란을 겪은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백제(百濟 BC.213∼AD.660년)가 망하고 고구려(高句麗 BC.231∼AD.668년) 또한 망한다. 이때 신라는 당나라와 합세하여 신라통일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작전으로 고구려, 백제가 망한 것으로 史書에는 기록하고 있으나, 고구려 백제가 망할 무렵 수(隋), 해(奚), 말갈(靺鞨), 왜(倭) 등이 복합적으로 협공하므로 어쩔 수 없이 고구려 백제는 망한 것이다. 신라와 당나라는 고구려 백제 속에서 기생하고 있었다.
 
그때 南朝(宋 齊 梁 陳 後粱)와 北朝(北魏 東魏 西魏 北齊 北周)는 자연 소멸되고 말았다. 이때 唐나라는 고구려가 소유했던 강역 모두를 가지게 되었다. 고구려의 강역은 멀리 天山에서부터 몽고, 만주 일대, 섬서성 西安과 洛陽 이북 한반도 등 현재의 日本까지 광범위한 땅이었다.
 
고구려의 역사는 광개토대왕의 비문에 있는 것처럼, 서역에 있는 비려국(비리국임)을 토벌했다고 되어있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기록은 유양잡조전집 예전편에, 중국 곤륜산길 서쪽의 가까운 길목에 고구려와 백제가 있었다고 전한다.
 
삼국사기 지리 4편에 고구려의 영토에 속하는 성들을 열거했는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바로「돈성까지 였다」라는 대목이다. 돈성이란 중국의 곤륜산과 천산산맥이 동쪽으로 뻗어있는 청해성 위쪽과 신강성 끝쪽, 영하성 끝쪽의 세 부분이 맞물린 곳에 돈황이 있었던 성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영토가 얼마나 넓었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백제의 강역은 섬서성 西安을 위시해서 산서성, 안휘성, 강소성 일부, 호북성, 호남성, 귀주성, 사천성, 광동성, 광서성, 운남성, 청해성 등 백제는 번성기에는 엄청난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다. 다만 산동성은 일부에 지나지 아니했다. 이 땅은 백제가 망한 후 모두 신라가 차지한 것이다.
 
당나라는 고구려 땅, 신라는 백제 땅을 가졌을 뿐 신라가 통일했다고 볼 수 없다. 그런데도 식민사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고 무조건 신라가 통일하였다하여 통일신라란 말을 거리낌없이 난발한다. 이것은 역사를 잘못 안 것이므로 하루빨리 고쳐야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民族의 역사적 통일은 단군조선 1, 3기이다. 이때는 모두 禪과 道를 통한 聖君이 선정을 했기 때문이다. 신라가 대성업을 이룩한 것은 독자적 행위가 아니므로 신라통일을 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신라가 망한 것은 56대 경순왕(敬順王 AD.927∼935년) 때이다.
 
新羅本紀에 보면 경순왕 8년 가을인 9월이었다. 고려(高麗 AD.935년) 太祖에게 항복한 곳이 적혀 있다. 운주계(運州界) 30여 郡과 縣이다. 운주계를 조사해보니 운성(運城)이었다. 운성이 운주계이며, 이곳은 대륙 산서성 안읍현(安邑縣)임을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과 일치했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 AD.935년)은 당나라 이연(李淵 AD.618∼907년)에 이어 후당(後唐 AD.923∼936년)의 혈통으로 이어져왔기 때문에 王建은 대륙에서 신라로부터 항복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또 신라와 백제의 국경에는 고구려와 말갈이 있었는데, 말갈이 자주 신라와 백제 국경을 침공한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말갈의 선조는 물길(勿吉)이며, 말갈의 후예는 발해(渤海)이다. 발해가 한반도에 없었듯이 말갈도 현 한국 땅에 없었으므로, 신라가 대륙에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가 등극한 후 후당(後唐 AD.923∼936년), 후진(後晋 AD.936∼946년), 후한(後漢 AD.947∼950년), 후주(後周 AD.951∼960년)인 고려와 함께 있었지만, 이들은 한결같이 4년에서 14년 사이로 사라져 갔다.
 
그 후 송(宋 AD.960∼1279년), 북송(北宋 AD.960∼1127년), 남송(南宋 AD.1127∼1279년), 거란(遼 AD.907∼947년), 금(金 AD.1115∼1234년), 몽고(蒙古:元 AD.1206∼1368년), 명(明 AD.1368∼1661년) 나라들과 함께 고려(高麗 AD.935∼1395년)도 같은 시대 같은 땅인 대륙에서 운명을 함께 한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고구려·백제·신라 보다 오히려 고려가 당나라가 망한 후 삼한(三韓) 땅을 통일한 것으로 사서(史書)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특히, 한치윤은 해동역사(海東繹史) 삼한편(三韓篇)에서, 三韓 땅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三韓 땅은 만주 일대와 몽고 일부, 그리고 天山 신강성(新疆省), 청해성(靑海省) 일부이다. 따라서 대륙 남부에 있는 광주(廣州), 홍콩, 운남성(雲南省) 등 대단히 넓은 지역이었다.
 
고려(高麗)가 삼한(三韓) 땅을 통일했다고 하는 것은, 주로 하북성(河北省) 일부와 산서성(山西省), 섬서성(陝西省), 그리고 산동성(山東省) 일부, 하남성, 호북성, 호남성, 안휘성, 강소성 일부이며, 귀주성, 사천성, 광동성 등을 걸친 광범위한 지역에 고려는 강역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고리·구려·고려(高驪), 또는 고구려(高句麗), 고려(高麗)의 이름이 폭넓게 전해져 왔기 때문에 지금도 한국의 국호를 꼬레아 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통일은 삼국이 망한 후 고려가 통일을 했던 것으로 정사(正史)들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마한은 주(周)나라 때 한(韓)의 뿌리로 이어져 왔다. 하지만 감숙성 변방에 있던 진(秦)은 진한(秦韓)으로서 한(漢)에게 유린당한 먼 훗날 진한(秦韓)은 진한(辰韓)으로 발전하게 되고, 그후 신라의 건국을 이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신라 시조 혁거세는 거서간(居西干), 즉 서이(西夷)로서 조선유민으로 흘러와 신라를 건국하게 되는 것이다.
 
진서(晉書) 본문에서 보듯이 고구려는 마한, 백제는 변한, 그리고 신라는 진한(秦韓 또는 辰韓)으로 본다면 큰 잘못이다. 물론 최치원이 본 것도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그러나 딱 잘라서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을 신라로 본다면 크나큰 잘못이다. 진서(晉書) 본문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진한(辰韓은 秦韓)과 마한이 함께 있었고, 또 가까이 경계선을 두고 서로 사이좋게 살았다. 하지만 진(秦)나라 사람이 너무 많이 망명 또는 피난을 와서 동쪽 경계에 살았기 때문에 그 지역을 진한(秦韓)이라고 했다는 점이다. 조선왕만(朝鮮王滿)이었던 준왕(準王)이 진(秦)나라를 치고 한(漢)나라를 세운 것으로 봄이 옳을 것이다.
 
삼묘족의 시조인 반고환인 이래 복희, 황제, 요순 등이 모두 희(姬) 성 이었다. 성씨의 뿌리가 내리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삼한 때부터이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성씨의 혈통 계보는 뿔뿔이 흩어졌다.그리고 삼국(고구려,백제,신라)을 거치면서 성씨의 뿌리는 뚜렸해 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시대 에도 뚜렷하게 혈통계보를 기록 했다는 증거는 희박하다. 그후 고려때 와서 성씨 계보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기록한 성씨의 혈통은 모두가 삼한(三韓)으로 기준되어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한 뿌리 혈통을 가진 배달민족 임이 분명하다.
 
황제의 아들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는 직접 희씨성을 썼다. 이분이 신라의 시조 이다.
고구려의 시조는 황제의 아들 창의(昌意)와 어머니 창복(昌僕) 으로부터 태어난 전욱고양씨의 아들 제곡고신씨 이다. 마찬가지로 희씨성을 썼다.
 
"제곡고신씨의 세번째 부인 진풍씨(陳豊氏 본명은 경도 慶都) 에게서 요임검이 태어났다. 요임검은 서자 몸으로 태어나 버림을 받았다. 워낙 머리가 뛰어나 버림을 받아 고생을 하면서도 돈황에 있는 삼위산에서 도를 닦아 18세때 등극 하였다."
 
"희씨의 혈통으로 내려온 나라가 40개국 이상이며 형제나라는 15개국이다. 그리고 제후국이 70개국 이며 왕이외 소국인 제국왕의 나라수는 자그만치 1,800나라가 넘는다."고 역대신선통감 본문 180쪽에 기록 하고 있다. (三國 姓氏의 원류上. 下 참고) 
 
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는 복희, 염제, 신농씨, 黃帝, 소호금천씨, 전욱고양씨, 제곡고신씨, 요, 순, 하, 은, 주, 진(秦), 한(漢), 서한(西漢), 동한(東漢), 후한(後漢), 삼국(三國), 위(魏), 촉(蜀), 오(吳), 진(晋), 서진(西晋), 동진(東晋), 남조(南趙)는 송(宋), 제(齊), 양(梁), 진(秦), 후양(後粱), 북조(北趙)는 북위(北魏),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그리고 수(隋), 당(唐), 무주(武周), 오대시(五代時), 북송(北宋), 남송(南宋), 거란(契丹), 요(遼), 서요(西遼), 금(金), 몽고(蒙古), 원(元), 명(明), 후금(後金), 청(淸) 등은 모두 고조선(古朝鮮)이 뿌리라고 밝히고 있다.

 

이중재, 역사연구가 (정리 : 박민우/시대소리 역사전문위원)

 

===

출처 : 바른말 바른사회
글쓴이 : 알마자야 원글보기
메모 :